청소년 유럽 - 평등의 상징 프랑스의 빵
* 빵도 평등한 나라 프랑스
우리나라도 이제는 빵 장인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다양하고 고급스런 바게트를 맛 볼 수있게 되었다.
2000년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파리 바게트의 빵집 체인점의 전국매장확대는 보다 많은 대중들이 빵에 접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 반면 주변의 소규모 제과점들은 문을 닫거나 체인점으로 전환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빵에 대한 소비와 관심 그리고 제빵을 외국이나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만드는 전문가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웬만한 도시에서는 체인빵집을 맛이나 영양인테리어 등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빵집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대기업 등에서 들여온 외국 전문 베에커리 전문점의 속속 등장은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입맛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좋아하는 빵집 중에 청담동과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에 진출한 기욤이라는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빵집이 있다. 이곳 포장지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문구가 적혀있다.
프랑스에서는 “전통 프랑스 빵”을 법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욤에서는 모든 빵을 이 법에 의거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법에 의한 “전통 프랑스 빵”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완성된 평등권
1792년 프랑스 혁명 시민들은 “빵을 달라” 라고 외친다.
당시 상황은 찰스 디킨슨의 소설 ‘두 도시’인 런던과 파리에서
고통 받는 도시 파리의 분위기를 잘 표현한 부분이다.
오래전부터 관리들은 부패했고 시민은 가난에 찌들어 있다.
“포도주를 실어 나르던 수레에서 통이 하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깨지더니 술이 온통 길바닥에 쏟아졌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나와 바닥에 있는 포도주를 거둬 마신다.
어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오므려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렸고 어떤 사람은 술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등 뒤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들에게 한 모금 맛보게 해주었다. 깨진 사금파리로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떠 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머릿수건을 풀어 포도주에 담갔다 아기 입안에 짜 넣어주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있는 포도주가 흘러가지 못하도록 흙으로 둑을 쌓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흙이 섞인 술을 손가락으로 훑어 마셨다.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바닥에 있는 술을 먹지 못한 사람은 술이 배어있는 깨진 포도주 통 조각을 주워서 질겅질겅 씹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난 후 그곳은 마치 청소부가 지나간 것처럼 깨끗했다.”
“이 포도주 난리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 어떤 남자가 오더니 남아 있던 붉은 포도주를 손가락에 찍어 벽에 ‘피’라는 낙서를 쓴다.”
혁명의 시기가 가까웠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위의 글에는 혁명전 파리 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있다.
이런 상황에 무지했고 관심없었던 마리 앙뚜와네트의
"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않느냐!"
( 케잌은 와전되었고 실제로는 브리오쉬라는 밀가루·버터·달걀·이스트·설탕 등으로 만든 달콤한 프랑스 빵을 얘기했다고 한다.) 라는 언급은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더하는 계기가되기에 충분했다.
*“빵의 역사” 는 오랜 기간 동안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콜로세움은 빵을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한 곳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들은 민심의 안정을 위해 검투사 경기를 만들고 국민의 30%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빵을 제공했다고 한다. 로마 곳곳에는 대규모의 빵을 구울 수 있는 화덕이 존재했기 때문에 국민들을 위한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었다. 빵은 권력을 필요로 하는 자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정치인들은 콜로세움에 빵만 던져 놓으면 다 해결된다고 말을 하기도 하였다.
“빵의 색깔과 종류를 놓고 신분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자격이 구분됐다.
이탈리아에서는 농부는 딱딱한 검은 빵만 먹을 수 있었고 흰색의 부드러운 빵은
귀족과 시민계층의 몫이었다. 시저 시절에는 죄수들에게 검은 빵이 제공됐다.
검은 빵은 톱밥이나 진흙, 도토리, 나무껍질 등을 몰래 집어넣어 만들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았고, 심지어 독을 집어넣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프랑스 농부들도 이탈리아 농부처럼 거칠고 딱딱한 검은 빵을 먹었다.
얼마나 딱딱했는지 빵을 자를 때 도끼를 사용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농부들은 돼지보다 조금 더 진화한, 열등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딱딱한 빵을 먹어야 더욱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귀족들의 생각이었다. 신이 부드럽고 흰 빵을 만든 것은 귀족들의 고상하고 연약한 소화기능을 위해서라는 것이 귀족의 논리였다. 그래서 농부들이 부드러운 흰 빵을 먹으면 신의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와 기강을 해치는 범죄였기 때문에 처벌을 해야 했다.“ [음식 잡학 사전- 윤덕노]
*빵을 달라 = “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 ??!!
프랑스 혁명때 시민들이 빵을 달라 라고 외친것도 사실은 단순히 먹을 것을 달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고 외쳤다는 설도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파리 시내 거지들이 먹는 빵이 시골 농민들이 먹는 빵보다 더 좋은 빵을 먹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빵의 평등권 [Le Pain Égalité] [The BREAD of EQUALITY]
프랑스 혁명직후 프랑스 구제도를 해체한 국민의회는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 박애를 추구한다.
이는 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재료와 성분이 같은 빵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고 선포한다.
tous les Français devaient manger le même pain « La richesse et la pauvreté devant également disparaître du régime de l’égalité, il ne sera plus composé un pain de fleur de farine pour le riche et un pain de son pour le pauvre. Tous les boulangers seront tenus, sous peine d’incarcération, de faire une seule sorte de pain : Le Pain Égalité ».
바게트 역시 법으로 정해진 80 cm 길이와 250g 의 무게를 지켜야했다.
[가격은 1980년대 까지 국가가 법으로 정해서 관리해왔다]
1993년에는 균등한 바게트가 아닌 보다 영양과 고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빵의 장인들의 손길을 거친 고품격 바게트 시장에 대한 제빵사들의 열망과 보다 우수한 품질의 바게트를 원하는 시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1993년 발라뒤르 정부는 장인들의 제빵과 제과점의
가격 결정권을 자율적으로 허용해주었다.
la baguette s’est généralisée en France, d’une longueur de 80 cm et d’un poids de 250 g, son prix a été jusque dans les années 1980 fixé par arrêté préfectoral. Mais il faudra attendre 1993 pour que la baguette « tradition », soit officiellement reconnue par le fameux « décret pain » du gouvernement Balladur, qui visait à donner un nouvel essor à la boulangerie artisanale alors soumise à la concurrence jugée « déloyale » des grandes surfaces.
* 그 나라를 여행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여행
르몽드 www.lemonde.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