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용머리 해안은
바람과 바다에 의해 만들어진 제주 지질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바람과 바다가 억겁의 세월을 통해 만들어낸 땅이라는
마치 외과의사가 날까롭고 정교한 칼로 표피와 살을 드러내고
붉은 피에 젖은 하얀 뼈를 드러낸듯한 층층의 바위절벽, 자연이 만들어낸
그 규모와 높이가 사진 배경만으로도 넉넉히 펼쳐진다.
이런 곳은 어디에도 흔치않다.
청소년들에게 이곳을 실제로 걷고 크기를 몸소체험한 경험은
전공여부를 떠나 우리가 사는 땅에대한 경험치를
늘려줄것이다.
헨드릭 하멜
용머리 해안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곳이 하멜표류기의 첫 장면
태풍과 암초에 좌초되었던 배 스페르베르 호와 하멜 동상과
효종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잡혀가 10여년을 보냈다.
이 치욕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재위 10년(1649~1659년) 동안 강력한
북벌(北伐)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북벌정책은 관리들의 비리 등 여러이유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이나 청나라에 알려지기를 꺼렸던 기밀유지 정책을 이유로 본인이 원하던
(더 아쉬운 점은 네델란드 황금시대의 뛰어난 항해기술 무기, 세계정보 등 당시 조선은 하멜일행의 기술력을 전수 받지못했다)
그는 무려 13년 이나 조선의 포로로살았지만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의 탈출을 시도 끝에 15년 만에 고향인 네델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용머리해안이 잊을 수 없는
장소로 그리고 13년 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조선에 포로로 잡혀있으거라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2~300여명이 제주에 유배를 왔다.
조선조 최고의 학자 우암 송시열, 광해군과 면암 최익현,
제주 최초의 천주교인 정난주 마리아 등 임금에서부터 여인까지 남녀노소가
모두 유배를 왔었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가 급사했다.
청소년에게 천원의 입장료를 받는
* 조선 시대 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7세다.
당시 백성의 평균 수명이 35세 이하였던 것에 비해 10살 이상 오래 산 셈이다.
국왕은 의식주 생활이 풍족하고 의료혜택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망 당시 효종의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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